
예, 삶의 질서 한국을 포함한 동아시아에서 '무례하다'는 말은 경멸을 의미한다. 예의가 없다는 말은 지위나 학식의 높고 낮음 이전에 인간다움의 기초가 잘못되었다는 사회적 판결이다. 이 때문에 무례한 태도는 기본적인 인간관계와 사회생활에 커다란 악영향을 미친다. 무지는 채워나갈 수 있지만 무례로 인한 관계 회복은 힘들다. 예는 사회생활에서 지켜야 할 규범 형식을 총칭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개인의 다양한 가치를 추구하는 현대사회에서 예는 자칫 고리타분하고 갑갑할 수 있다. 예를 속박과 형식이라고 여기는 분위기 탓이다. 인사는 관계의 시작이고 줄서기는 기본 질서임을 몰라서가 아니다. 해도 좋고 안 해도 문제되지 않는 사회 분위기 속에서 자발적으로 마음먹고 행동하기 쉽지 않다. 그렇다고 예 없이 살 수 있을까?..

유교와 자본주의의 짧은 만남 동아시아 여러 나라에서 자기 전통의 부정을 수반한 맹목적 서구화의 노력으로 유학이 설 자리는 사라지거나 좁아졌다. 그런데 1970년대 이후, 이변이 일어났다. 자본주의가 발전할 수 없다던 동아시아가 가파르게 경제성장을 이루며 세계를 놀라게 하였다. 일본을 선두로 한국, 홍콩, 대만, 싱가포르의 경제가 비약적으로 발전하면서 베버의 이론은 비판을 받았다. 그리고 폄하되었던 유학이 동아시아의 경제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는 것에 대한 탐구가 시작되었다. 교육존중, 성취의욕, 근면절약, 가족 및 소속 단체에 대한 충성, 개인보다 집단이 중시되는 유교윤리가 그 대상이었다. 이것들이 동아시아인들의 상층부 의식구조를 지배하여 경제 발전의 정신적 기반이 되었다고 보았다. 그리고 이를 아시아..

자연도 이익을 누리도록 의는 사람에게만 해당되지 않고 자연에까지 미친다. 무분별한 환경 파괴나 자원 낭비를 막고, 천지자연이 공존하는 것 역시 의이다. 공자는 낚시는 하셨지만 그물질은 하지 않으셨고, 주살로 새를 잡았지만 둥지에서 자는 새는 쏘지 않으셨다. 공자의 시야는 인간과 인간의 관계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관계망을 보다 넓게 확장시켜 천지 만물을 하나로 보았다. 이 관점에서 보면, 인간과 자연은 긴밀하게 영향을 주고받는 존재이므로 더불어 살 뿐만 아니라 서로의 됨됨이를 이루어준다. 하지만 때에 따라 자연을 이용하는 것은 불가피하다. 그렇다고 자연을 인간 마음대로 무한정 착취해도 괜찮다는 뜻은 아니다. 최소한의 필요만 충족시키면 된다. 공자도 낚시질과 주살질을 했다. 하지만 큰 그물로 작은 물고기까지..

의로운 이익추구의 길 예나 지금이나 먹고사는 경제적 문제는 늘 중요하다. 공자가 위나라에 갔을 때 염유와 주고받은 대화는 민생문제가 얼마나 중요한지 보여준다. 위나라에는 백성들이 많았다. 그 모습을 본 공자가 수레를 모는 염유에게 백성들이 많다고 하자 염유는 이에 무엇을 더 해야 하는지를 물었다. 자식을 낳았다고 부모 역할을 다한 것이 아닌 것처럼 백성들이 많다고 해서 통치자가 책무를 다한 것은 아니다. 위정자는 반드시 백성들의 민생문제 해결을 정책의 핵심으로 삼아야 한다. 민생의 중요성은 맹자도 언급했다. 맹자는 위정자들이 백성들에게 일정한 생업을 제공하지도 않으면서 백성들이 어쩔 수 없이 저지르는 생계형 범죄를 형벌로 다스리는 세태에 목소리를 높인다. "선비는 일정한 생업이 없어도 떳떳한 마음을 지닐..

이익 밝히면 천하다고? 공자는 군자의 덕목으로 인과 함께 의를 제시한다. '군자는 의를 으뜸으로 삼는다.'. '군자는 의를 바탕으로 삼는다.', '군자는 의를 따를 뿐이다.'가 그것이다. 또 군자를 소인과 비교함으로써 군자를 효과적으로 부각한다. "군자는 의로움에 밝고, 소인은 이익에 밝다." 등이다. 논어에는 이익을 경계하는 공자의 언설이 꽤 많이 등장한다. 이익에 대해 말하기를 꺼려하였고, 이익에 빠져 행동하면 원망이 많으며, 조그만 이익의 추구는 경계해야 한다는 것이다. 공자가 경계한 것은 남을 배려하지 않은 이익추구였다. 도덕적 가치를 소홀히 하고 이익만을 탐하면, 이익추구가 모든 행위의 목적이 되어 사회가 혼란해질 수 있다는 것이다. 이를 통해 볼 때 공자의 관심은 개인의 이익을 넘어선 의로움의..

정명, 다름의 조화 노년의 공자에게 계강자가 정치의 도를 물었다. 공자는 '정치란 바르게 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대부인 계강자는 당시 노나라의 실권자였다. 그는 이욕에 빠져 제후의 일을 넘보고 분수에 맞지 않게 정사를 논했다. 공자는 그것이 잘못임을 깨우치기 위해 직언을 한 것이다. 공자가 젊었을 때 계손씨의 한 사람인 계평자가 자신의 뜨락에서 천자만이 거행할 수 있는 '팔일무'를 추도록 했다. 대부인 계평자는 사일무를 행해야 하지만 당시 노나라는 환공의 후손인 삼환이 실권을 장악하여 전횡했기에 그들은 예법이 어긋난 행동을 거리낌 없이 행하였다. 공자는 "그 지위에 있지 않으면 그 자리에서 처리해야 할 일을 도모해서는 안 된다." 라고 하였다. 제자리와 자기 분수를 알고 자신의 자리에 맞는 일을 자각하..

ㅇ 의로운 정치, 무대에 서다 맹자가 볼 때 두 무리는 가족과 사회 공동체를 파괴하는 주범들이다. 양주는 자기만 행복하면 그만이었다. 터럭 한 올을 뽑아서 천하를 이롭게 할 수 있다 해도 하지 않았다. 남이 어떻게 되든 관심이 없다. 그에게 공동체를 위한 헌신과 희생은 무의미한 행동이었다. 이들 무리에게는 개인 윤리나 사회 및 국가 공동체의 공공 윤리 등은 속박에 지나지 않는다. 이들은 임금을 중심으로 형성된 사회나 국가를 부정하기 때문에 '임금이 없는 사상'이다. 한편 묵자는 누구나 똑같이 사랑할 것을 주장했다. 그는 이마를 갈아서 발꿈치에 이르더라도 천하에 이로우면 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가 겸애를 외치며 모든 사람을 똑같이 사랑해야 한다고 한 것도 이 때문이다.그런데 나의 부모와 남의 부모, 나의 ..

사람이 먼저다 조선 건국의 사상적 기틀을 닦은 정도전, 그는 조선이 유교의 핵심 가치인 인의예지가 구현되는 이상사회가 될 것을 염원했다. 이 때문에 도성을 드나드는 4대문을 흥인지문, 숭례문, 돈의문, 흥지문이라고 명명했다. 또 이궁으로 창덕궁을 창건하며 왕의 즉위식과 왕비의 책봉례, 신하의 하례 및 외국 사신의 접견 등 주요 업무를 담당했던 정전을 인정전이라고 명명했다. 어진 정치가 실현되기를 소망한 것이다. 인의예지는 맹자에서 비롯한다. "불쌍하고 안타깝게 여기는 마음은 인의 단서요, 부끄러워하고 미워하는 마음은 의의 단서요, 배려하고 사양하는 마음은 예의 단서요, 옳고 그름을 가리는 마음은 지의 단서이다." 일반적으로 단서는 실마리로 풀이한다. 사단과 같은 네 가지 감정으로 미루어보면, 우리의 내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