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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의 현실

유교와 자본주의의 짧은 만남

동아시아 여러 나라에서 자기 전통의 부정을 수반한 맹목적 서구화의 노력으로 유학이 설 자리는 사라지거나 좁아졌다. 그런데 1970년대 이후, 이변이 일어났다. 자본주의가 발전할 수 없다던 동아시아가 가파르게 경제성장을 이루며 세계를 놀라게 하였다. 일본을 선두로 한국, 홍콩, 대만, 싱가포르의 경제가 비약적으로 발전하면서 베버의 이론은 비판을 받았다. 그리고 폄하되었던 유학이 동아시아의 경제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는 것에 대한 탐구가 시작되었다. 교육존중, 성취의욕, 근면절약, 가족 및 소속 단체에 대한 충성, 개인보다 집단이 중시되는 유교윤리가 그 대상이었다. 이것들이 동아시아인들의 상층부 의식구조를 지배하여 경제 발전의 정신적 기반이 되었다고 보았다. 그리고 이를 아시아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는 '유교자본주의'라고 명명하였다. 이후 '유교자본주의'는 사회과학자들까지 가세하여 한동안 첨단을 상징하는 사회문화 코드로 유행하였다. 하지만 잠깐이었다. 1997년 말, 한국을 비롯한 동아시아 경제가 국제통화기금 관리 하에 들어가자, 아시아적 가치는 부패, 연고주의, 불투명성 등을 야기한 장본인으로 지목받았다. 그리고 도덕적 해이. 패거리 자본주의 등의 부정적 용어들이 유학과 연결되었다. 유학은 다시 국제사회의 싸늘하고 따가운 시선을 견뎌야 했다. 그러나 유교자본주의 담론은 유학의 본질을 중심으로 유학적 경제 모델을 모색한 것이 아니다. 베버가 설정한 도식, 곧 자본주의 발전을 가능하게 한 요소들을 유교에서 찾아보려는 시도였다. 이승환은 '유교담론의 지형학'에서 지금까지 한국의 경제성장 과정은 철저히 '반유교적'이었다고 평가한다. 그에 의하면 그동안 한국의 재벌과 기업가는 온갖 탈법과 부정을 자행하며 '부를 위한 부'만을 추구하였다. 이것은 유학의 '견리사의'정신과는 맞지 않다. 정치는 어떤가? 정부는 경제발전을 주도하기 위해 '강한 정부'를 표방하면서 국회와 정당을 무력화하고 정보기관과 사법기관을 손아귀에 쥐고서 국민을 탄압했다. 경제도 정치도 철저하게 반유교적이었다. 또한 자본주의 발전에 기여했다는 한국의 가족주의와 공동체주의 역시 유교의 본질과 다르다. 이승환은 "유교의 서는 폐쇄적 가족주의를 지양하고, 좀더 넓은 사회를 향해 사랑을 확장시키라고 말하지, 족벌체제와 집단이기주의에 머물라고 말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이처럼 유교자본주의에 대한 논의는 매우 상반된다. 이는 유학의 본질과 동아시아 자본주의 발전의 상관성을 깊이 있게 다루지 않은 데서 비롯된다. 즉 유학의 한 특징인 가족주의, 근면, 협동, 교육열과 잘못된 방식으로 고착된 유교문화의 특수성으로 동아시아 발전의 원인을 찾으려고 한 결과이다. 그렇다면 유학의 본질을 통해 자본주의의 모순을 극복하고 새로운 경제 패러다임을 제시할 길은 없을까?

유학과 자본주의의 새로운 동거

'부자 삼대 가지 못한다.'는 속담이 있다. 삼대는 90년이다. 즉 부자라 할지라도 한 세기를 넘기기 어려움을 말한다. 하지만 한국에는 12대 300년 동안 부를 누린 부잣집이 있었다. 경주 최부자집이 그 예이다. 최부자의 삶에는 유학의 본질이 온전히 반영되어 있었다. "많은 사람들의 굶주림이 이 지경이 되었는데 어찌 집안 재물을 아껴 저들이 죽어가는 것을 보고만 있겠는가?" 조선 중기 경주지역에 흉년이 닥쳤다. 거리엔 굶어죽는 사람들이 허다했다. 당시 사옹원 참봉을 지낸 최국선은 자신의 곳간을 헐었다. 그는 여느 부자와 달리 풍년의 기쁨과 흉년의 아픔을 이웃과 함께 감수하는 것이 부자의 도리라고 믿었다. '사방 100리 안에 굶어 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는 가훈도 이때 생겼다. 당시 부자들에게 흉년은 재산을 불릴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굶어죽지 않기 위해 형편이 다급한 농민들이 헐값에 농토를 내놓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사들인 논을 벼 한 섬으로 샀다고 해서 '한 섬 논'이라 불렀다. 그러나 최부자는 그들과 정반대의 길을 걸었다. 최부자 집안의 육훈은 3대도 잇기 어렵다는 부를 300여 년간 유지해 온 힘이었다. 재산 증식에 있어 무엇보다 도덕성이 우선되었다. 또한 더불어 사는 인을 실현한 것이 궁극적 목표였다. 그는 지위와 부에 따른 사회적 의무와 책임을 말하는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전형을 보여주었다. 유학은 모든 존재자를 내면의 덕성ㅇ에 의해 하나로 연결된 존재로 본다. 만물일체적 관계론을 기반으로 자본주의에서 정의하는 이익과는 다른 새로운 형태의 이익을 제시한다. 혼자 취하는 이익은 철저히 거부하고, 나와 연결된 수많은 존재자들과 조화로운 관계를 유지하는 것을 중시한다. 따라서 매 순간, 상황에 합당한 '의'에 의거하여 모두가 이로운 세상을 추구한다. 이것이 유학이 동의하는 의로운 이익이다. 논어의 이익추구는 기존 자본주의에서 드러나 이기주의, 물질 만능주의, 환경파괴, 소득격차 등의 다양한 문제를 법과 제도의 보완으로 해결하려고 하지 않는다. 내면의 덕성에 기초하여 스스로를 돌아보게 한다. 낱낱의 경제 주체가 부끄러움을 알아서 스스로 돌이키도록 한다. 이로 인해 개인과 공동체의 조화와 남을 나처럼 여기는 세상을 만든다. 사람과 물질의 차례와 역할이 분명해지고, 분배가 정당하고 고르게 이루어진다. 불만과 분노가 아닌 위로와 격려가 함께 하는 융평의 세상이 이루어진다. 또 마구잡이식 개발이 아니라 적절한 자연 이용으로 조화로운 생태계가 유지된다. 우리는 근대화의 물결 속에서 자의든 타의든 자신의 뿌리인 동아시아 사상과 문화를 폄하했다. 그리고 서구 자본주의를 적극적으로 도입하고 그 속에 내포된 이성, 합리, 자유, 과학 등의 근대적 가치에 열을 올렸다. 서구가 길어올린 그러한 가치들도 소중하다. 하지만 자본주의는 지금 근본적인 전환을 요구받고 있다. 그것은 분명 다원화된 가치가 말살되고 오로지 하나의 방식으로 정의되는 자본주의는 아닐 것이다. 다양한 가치가 존중되고 서로 조화를 이루는 '화의부동'이 그 중심에 있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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